안채 - 가족 이야기

글수 89
어제, 희주 친구가 춘천 102보충대에 입소(入所)를 했겠군요.
고등학교 때부터 간혹 보아왔던 녀석은 지난주 어느 날,
군대에 가기 전에 제 어머니와 제게 인사를 드리겠다며 수동에 들어왔었습니다.
그 아이가,
수도권 어느 대학에 진학한 후, 지 적성과는 맞지 않아 학과 공부에 흥미를 잃을 즈음
지 어머니의 병고(病故) 까지 겹쳐 휴학을 하고는
어쩔 수 없이 가장의 책무를 떠맡아 어느 백화점에서 근무한 것까지는 자연스레 알 수 있었는데,
이는 간혹 희주를 통해 알게 된 그 아이와 가족의 근황일 수도 있겠습니다.
근데 그 근황은 제 나름으로 그 이상을 추론할 때 사용하는 붙박이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복무했던 30년 전의 시절과는 확연히 달라지게 했을--그렇기를 소망합니다.--세월의 흐름을 무시할 수 없어
자기 선배들과 대화를 자주 가졌는지를 확인하는 정도에서 말을 아끼며
그저 집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로 따뜻한 밥 두끼를 해먹인 것이
입소를 앞두고 찾아온 아이에게 제가 해준 전부였습니다.
그 아이의 가족이 희주와 함께 동해안으로 1박 2일의 여행을 하고 수동에 들렀을 때가
아마 희주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을 겁니다.
제 아버님이 살아계셨을 때에는 그나마
한달에 한 번 정도는 부모님과 어린 희주를 데리고
서울에서 가까운 온천 등지를 돌며 여행을 다니곤 했었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어머니와 저 그리고 희주만 달랑 움직이는 일이 극히 적어졌습니다.
여행지 음식점에서 식사할 때 제 스스로 주위의 시선을 불편해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랬기 때문에 희주가 친구나 친구 가족들과 하는 여행을 부추기는 편입니다.
아마 그래서 희주가 가족과 함께 했던 여행이라는 것이 대개는
제 누이 가족들 모두와 함께 떠나는 여행에 국한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고등학교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배낭을 매고 홀로 여행을 다닌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데 이상하지요? 그 여행지는 아버지를 따라 갔던 곳일 때가 많았습니다.--
4년여 전의 그날, 그 가족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제 마음의 고마움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을 터인데
조금은 당황스럽던 마음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혼한 어머니의 남자 친구를 아저씨라 부르며 흔쾌히 받아들이는 남매의 모습이 의외였었는데
그렇다고 저도 그 분을 정기 아빠인 듯 싶게 얘기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었습니다.
더우기 엄마 보다 몇 살 나이가 어린 사정을 알았을 때는 더욱 그러했었습니다.
보기 전에는 제 또래일 것으로 짐작했을 뿐이었는데
직접 보니 너무 젊어 보여 제가 나이를 물어 보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했듯이
저 역시 그 눈의 잣대로 남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 싶은데,--사실이 그렇기도 하지만--
참 부질없는 마음을 갖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속 좁은 마음으로는 희주의 아빠 역할만으로도 벅찼을 테니
그 녀석에게 여느 아저씨도 해줄 수 있는 말들조차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비로서 남자가 된다.
휴가 나오면 그때 들르거라."
데크에서 건투를 비는 악수를 나누며
지 삶을 본격적으로 헤쳐나갈 초입에 들어선 그 아이에게
지혜와 행운과 건강이 함께 하기를 빌었습니다.
편부나 편모 슬하의 아이들을 보면 왠지 그냥 마음이 아립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간혹 보아왔던 녀석은 지난주 어느 날,
군대에 가기 전에 제 어머니와 제게 인사를 드리겠다며 수동에 들어왔었습니다.
그 아이가,
수도권 어느 대학에 진학한 후, 지 적성과는 맞지 않아 학과 공부에 흥미를 잃을 즈음
지 어머니의 병고(病故) 까지 겹쳐 휴학을 하고는
어쩔 수 없이 가장의 책무를 떠맡아 어느 백화점에서 근무한 것까지는 자연스레 알 수 있었는데,
이는 간혹 희주를 통해 알게 된 그 아이와 가족의 근황일 수도 있겠습니다.
근데 그 근황은 제 나름으로 그 이상을 추론할 때 사용하는 붙박이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복무했던 30년 전의 시절과는 확연히 달라지게 했을--그렇기를 소망합니다.--세월의 흐름을 무시할 수 없어
자기 선배들과 대화를 자주 가졌는지를 확인하는 정도에서 말을 아끼며
그저 집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로 따뜻한 밥 두끼를 해먹인 것이
입소를 앞두고 찾아온 아이에게 제가 해준 전부였습니다.
그 아이의 가족이 희주와 함께 동해안으로 1박 2일의 여행을 하고 수동에 들렀을 때가
아마 희주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을 겁니다.
제 아버님이 살아계셨을 때에는 그나마
한달에 한 번 정도는 부모님과 어린 희주를 데리고
서울에서 가까운 온천 등지를 돌며 여행을 다니곤 했었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어머니와 저 그리고 희주만 달랑 움직이는 일이 극히 적어졌습니다.
여행지 음식점에서 식사할 때 제 스스로 주위의 시선을 불편해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랬기 때문에 희주가 친구나 친구 가족들과 하는 여행을 부추기는 편입니다.
아마 그래서 희주가 가족과 함께 했던 여행이라는 것이 대개는
제 누이 가족들 모두와 함께 떠나는 여행에 국한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고등학교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배낭을 매고 홀로 여행을 다닌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데 이상하지요? 그 여행지는 아버지를 따라 갔던 곳일 때가 많았습니다.--
4년여 전의 그날, 그 가족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제 마음의 고마움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을 터인데
조금은 당황스럽던 마음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혼한 어머니의 남자 친구를 아저씨라 부르며 흔쾌히 받아들이는 남매의 모습이 의외였었는데
그렇다고 저도 그 분을 정기 아빠인 듯 싶게 얘기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었습니다.
더우기 엄마 보다 몇 살 나이가 어린 사정을 알았을 때는 더욱 그러했었습니다.
보기 전에는 제 또래일 것으로 짐작했을 뿐이었는데
직접 보니 너무 젊어 보여 제가 나이를 물어 보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했듯이
저 역시 그 눈의 잣대로 남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 싶은데,--사실이 그렇기도 하지만--
참 부질없는 마음을 갖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속 좁은 마음으로는 희주의 아빠 역할만으로도 벅찼을 테니
그 녀석에게 여느 아저씨도 해줄 수 있는 말들조차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비로서 남자가 된다.
휴가 나오면 그때 들르거라."
데크에서 건투를 비는 악수를 나누며
지 삶을 본격적으로 헤쳐나갈 초입에 들어선 그 아이에게
지혜와 행운과 건강이 함께 하기를 빌었습니다.
편부나 편모 슬하의 아이들을 보면 왠지 그냥 마음이 아립니다.
2009.12.10 17:54:49
눈이 행복해할만한 식탁입니다.^^*
색감이 눈을 절로 맑게 합니다.
녀석들 대신 제가 잘 먹겠습니다.
지지난 주에 여동생이 코다리로 강정을 만들고 남은 대가리들을
냉동고에 얼려 보관해 두었었는데
그 가운데 세 개를 꺼내 뚝배기에 무와 다시마를 함께 넣고는
알탕용 밑국물을 만들었습니다.
그 속에 해동시킨 알탕재료를 깨끗이 씻어 넣고는
해물탕용 양념과 미나리, 깻잎 등의 야채를 넣어 푹 끓이니
그런대로 맛있는 알탕이 되었습니다.
귤을 까먹는 어머니 모습이 예뻐 보여 사진 한장 찍었습니다.
저녁 맛있게 드세요.
색감이 눈을 절로 맑게 합니다.
녀석들 대신 제가 잘 먹겠습니다.
지지난 주에 여동생이 코다리로 강정을 만들고 남은 대가리들을
냉동고에 얼려 보관해 두었었는데
그 가운데 세 개를 꺼내 뚝배기에 무와 다시마를 함께 넣고는
알탕용 밑국물을 만들었습니다.
그 속에 해동시킨 알탕재료를 깨끗이 씻어 넣고는
해물탕용 양념과 미나리, 깻잎 등의 야채를 넣어 푹 끓이니
그런대로 맛있는 알탕이 되었습니다.
귤을 까먹는 어머니 모습이 예뻐 보여 사진 한장 찍었습니다.
저녁 맛있게 드세요.
2009.12.11 08:46:49
세월이 그렇게 흘렀군요.
군대 갈 시기가 되었네요.
춘천의 102 보충대라는 이름을 보고
제가 일주일에 한번씩 가게 되는 춘천에서
낯익게 보아오던 이름이라 괜히 반가운 마음이었지요.
대한민국 젊은 청년들에게 군복무가 주는 영향은
좀 색다른 것이라 생각됩니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음을 아들을 군대에 넣고
나서야 실감합니다. 군복무 잘 마치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성교육 하느라 갔던 부대에서 부대장과
이야기 나누면서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면서 요즘 군대는 그래도 꽤나 인권적이-예전에 비하면-
되었다는 느낌을 갖게되었지요.
부모님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더라고요.
군대 갈 시기가 되었네요.
춘천의 102 보충대라는 이름을 보고
제가 일주일에 한번씩 가게 되는 춘천에서
낯익게 보아오던 이름이라 괜히 반가운 마음이었지요.
대한민국 젊은 청년들에게 군복무가 주는 영향은
좀 색다른 것이라 생각됩니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음을 아들을 군대에 넣고
나서야 실감합니다. 군복무 잘 마치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성교육 하느라 갔던 부대에서 부대장과
이야기 나누면서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면서 요즘 군대는 그래도 꽤나 인권적이-예전에 비하면-
되었다는 느낌을 갖게되었지요.
부모님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더라고요.
2009.12.11 11:55:10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간혹 입영통지서를 나이 들어 다시 받는 꿈을 꾸더랬습니다.
그만큼 남자들에게는 병역의무가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치뤄야할 징한 통과의례일 터인데
세월이 만병통치약이기 때문인지,
아님, 세월을 애써 이해하다 보니 지레 묽어진 아량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로써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그나마 많게 기억되는 군생활이었습니다.
제대한 분들이 꿈 속에서 다시 입영통지서를 받는 꿈을 꾸는 것이
저만의 꿈 속 얘기만은 아닐 겁니다.
그만큼 저마다의 군복무 얘기가 징했다는 반증일 수도 있을 터인데
저는 제가 그때 맺은 뭇 사람과의 관계 상황이 제 기질이나 성격으로써는 너무 벅찼기 때문에
정말 힘들었었습니다.
너는 하사니까 병이나 장교들과 또 다른 대척점에 있어야 하고
병이나 장교들의 속성은 이러저러하니까
우리 위치를 만드는 일에 굳건해야 한다, 하는 정도의 구타를 동반한 정신교육이
매일 밤마다 최전방에서 이루어졌었는데 정말 탈영을 하고 싶을 정도였었습니다.
그때는 1하교와 2하교 선배들이 함께 한 군시절이었습니다.
정말 1하교와 2하교 선배들은 처음부터 6개월간 하사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병으로 생활하다 차출되어 가평에서 3개월 교육을 받은 저와는
개념부터가 달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14개월 차부터 중화기 중대의 90mm 대전차 무반동총 소대의 내무반장이 되었는데
제 연대가 철책선 근무를 맡으면서 그 중대의 소대는 정말 편한 보직을 맡게 되었었습니다.
판문점 JSA 부근의 어느 초소를 떠맡아 그야말로 좋은 세월을 보낼 즈음,
야간에 순찰중이던 중대장에게 라면을 끓여 먹다 걸려,
중대장이 머무르던 서부전선 229고지의 81mm 박격포 소대에 재배치 되었는데
이게 저로써는 행복 그 자체였었습니다.
둘째 누이가 그 즈음 어느 한 남자를 만나 미국으로 떠날 때였는데
서부 전전 어느 고지에 근무하던 제게 배달된 전보의 내용은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간다는 얘기로 잘 못 전달되어
그 사실을 확인하느라 최전방 통일촌에 전화를 걸러 간 것이
제가 소속된 부대에는 CPX로 귀결되었었습니다.
제가 무장을 하고 부대를 이탈해었는지는 지금도 기억에 없지만
근무지를 이탈한 것이 전방에서 어떤 상황으로 각인될지는 이해합니다.
대대장과 그 상황에 대한 심각한 면담이 있었는데
그 전에 있던 연대 90mm 무반동총 사격대회에서 저희 소대가 우승한 전례가 있어
저는 영창을 가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중대장한테 엄청 워커발로 맞았는데 맞을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전방을 관측하며 포의 포격사격을 지휘하는 콘크리트 벙커인 OP에 들어가
다양한 타격의 포를 운용하는 요원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었고
교대 근무를 하면서 남은 시간으로 영어 공부를 했던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었는데,
가장 중요한 즐거움은 야간에 철책 근무자인 소대원들에게 뜨거운 커피를 배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시간은 초소에서 서로가 계급의 한계를 내려놓고 마음으로 소통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군생활은 지 부모를 모시는 마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계신 곳을 향해 아침마다 자신의 마음을 놓고 그들의 안녕을 비는 것이
사병들의 마음입니다.
누구는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이 앞서지만
의무병인 대한민국의 젋은이들은 지 부모와 가족들을 떠올리며
지금도 그 어려움을 이겨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군인들아!
지혜롭게, 그리고 즐겁게, 또한 아프게 이겨내거라!
오늘, 'KBS 아침 마당'프로그램의 주제가
"여자가 밥하기 싫을 때".였는데
그 맘을 알면서도 조금은 유치한 여자들의 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니 마음으로 느꼈으면 좋겠다.
니 마음으로 움직여야지
남의 마음따라 움직이지는 말거라.
희주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였습니다.^^*
결국 준비된 사람들만 결혼의 문턱을 넘었으면, 하는 생각이 다가왔는데
그 문턱을 너무 삶의 통과의례인 듯 무심히 넘어 선 사람들의 후유증을 보기 때문입니다.
간혹 입영통지서를 나이 들어 다시 받는 꿈을 꾸더랬습니다.
그만큼 남자들에게는 병역의무가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치뤄야할 징한 통과의례일 터인데
세월이 만병통치약이기 때문인지,
아님, 세월을 애써 이해하다 보니 지레 묽어진 아량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로써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그나마 많게 기억되는 군생활이었습니다.
제대한 분들이 꿈 속에서 다시 입영통지서를 받는 꿈을 꾸는 것이
저만의 꿈 속 얘기만은 아닐 겁니다.
그만큼 저마다의 군복무 얘기가 징했다는 반증일 수도 있을 터인데
저는 제가 그때 맺은 뭇 사람과의 관계 상황이 제 기질이나 성격으로써는 너무 벅찼기 때문에
정말 힘들었었습니다.
너는 하사니까 병이나 장교들과 또 다른 대척점에 있어야 하고
병이나 장교들의 속성은 이러저러하니까
우리 위치를 만드는 일에 굳건해야 한다, 하는 정도의 구타를 동반한 정신교육이
매일 밤마다 최전방에서 이루어졌었는데 정말 탈영을 하고 싶을 정도였었습니다.
그때는 1하교와 2하교 선배들이 함께 한 군시절이었습니다.
정말 1하교와 2하교 선배들은 처음부터 6개월간 하사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병으로 생활하다 차출되어 가평에서 3개월 교육을 받은 저와는
개념부터가 달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14개월 차부터 중화기 중대의 90mm 대전차 무반동총 소대의 내무반장이 되었는데
제 연대가 철책선 근무를 맡으면서 그 중대의 소대는 정말 편한 보직을 맡게 되었었습니다.
판문점 JSA 부근의 어느 초소를 떠맡아 그야말로 좋은 세월을 보낼 즈음,
야간에 순찰중이던 중대장에게 라면을 끓여 먹다 걸려,
중대장이 머무르던 서부전선 229고지의 81mm 박격포 소대에 재배치 되었는데
이게 저로써는 행복 그 자체였었습니다.
둘째 누이가 그 즈음 어느 한 남자를 만나 미국으로 떠날 때였는데
서부 전전 어느 고지에 근무하던 제게 배달된 전보의 내용은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간다는 얘기로 잘 못 전달되어
그 사실을 확인하느라 최전방 통일촌에 전화를 걸러 간 것이
제가 소속된 부대에는 CPX로 귀결되었었습니다.
제가 무장을 하고 부대를 이탈해었는지는 지금도 기억에 없지만
근무지를 이탈한 것이 전방에서 어떤 상황으로 각인될지는 이해합니다.
대대장과 그 상황에 대한 심각한 면담이 있었는데
그 전에 있던 연대 90mm 무반동총 사격대회에서 저희 소대가 우승한 전례가 있어
저는 영창을 가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중대장한테 엄청 워커발로 맞았는데 맞을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전방을 관측하며 포의 포격사격을 지휘하는 콘크리트 벙커인 OP에 들어가
다양한 타격의 포를 운용하는 요원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었고
교대 근무를 하면서 남은 시간으로 영어 공부를 했던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었는데,
가장 중요한 즐거움은 야간에 철책 근무자인 소대원들에게 뜨거운 커피를 배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시간은 초소에서 서로가 계급의 한계를 내려놓고 마음으로 소통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군생활은 지 부모를 모시는 마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계신 곳을 향해 아침마다 자신의 마음을 놓고 그들의 안녕을 비는 것이
사병들의 마음입니다.
누구는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이 앞서지만
의무병인 대한민국의 젋은이들은 지 부모와 가족들을 떠올리며
지금도 그 어려움을 이겨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군인들아!
지혜롭게, 그리고 즐겁게, 또한 아프게 이겨내거라!
오늘, 'KBS 아침 마당'프로그램의 주제가
"여자가 밥하기 싫을 때".였는데
그 맘을 알면서도 조금은 유치한 여자들의 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니 마음으로 느꼈으면 좋겠다.
니 마음으로 움직여야지
남의 마음따라 움직이지는 말거라.
희주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였습니다.^^*
결국 준비된 사람들만 결혼의 문턱을 넘었으면, 하는 생각이 다가왔는데
그 문턱을 너무 삶의 통과의례인 듯 무심히 넘어 선 사람들의 후유증을 보기 때문입니다.

멋진 만남, 행복한 사랑, 영원한 기쁨 누리길...